역대고승약사여래 근본도량, 민족의 영산 팔공총림 동화사

기성 쾌선

기성 쾌선(箕城快善, 1693~1764) 스님은 1764년 동화사에서 입적한 조선 후기의 고승이다. 이 해에 세워진 스님의 부도가 동화사에 있으며, 이 외에도 여러 기록에서 동화사에 남은 스님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쾌선 스님은 1727년 동화사 대웅전의 삼존불을 조성할 때 불사의 과정을 검증하는 증명비구로 참여하였고, 1732년 가람의 중창을 마무리하고 그 과정을 적은 《팔공산동화사사적기》를 편찬할 때 서문을 썼다. 또한 대웅전의 편액과 일주문의 〈八公山桐華寺鳳凰門(팔공산동화사봉황문)〉이라는 편액을 썼다고 전한다. 경상북도 칠곡 송림사에는 1772년에 세워진 스님의 비가 있어서 이를 통해 스님의 자세한 행장의 알 수 있다.

스님의 법명은 쾌선이고, 속성은 류씨(柳氏)로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칠곡 송림사로 출가하여 14세에 민식(敏湜) 대사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았다. 16세에 서귀(西歸)대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도덕산 태조(太照) 대사에게서 수학하고, 낙빈당(落賓堂) 홍제(弘濟) 대사의 강원에서 교학을 익혔다. 여러 경전을 공부하였으며 경의 뜻을 모두 이해할 때까지 궁리를 멈추지 않았다.

25세에 고율엄(高律嚴) 낙빈(落賓) 대사에게 수학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이후 주변에 이름이 알려져 배움을 청하는 자들이 날로 늘어갔다. 언변이 좋아 구애됨이 없었고 음성도 크고 밝았다. 가르치는 데 정성을 다하자, 배움을 찾아오는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어느 날 동화사에 머물면서 “경전을 풀이하는 것은 단지 설법자의 생각일 뿐이고, 언어의 해설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며 강론을 그만 두고 초가(草家)를 지어 80권 화엄경을 읽는데, 전체를 다 읽으면 다시 처음부터 읽기를 반복하였다. 밤에는 홀로 가부좌하고 묵묵히 좌선하며 밤을 지새웠다. 스님이 입은 옷은 납의(衲衣)와 버선뿐이었으며 모두 검은색이었다. 성격이 담백, 간소하고 정직하였으며, 사람들은 대사의 법성(法性)이 걸림 없이 원만하여 팔공산의 정기를 밝게 한다고 널리 칭송하였다.

1764년 팔공산에 머문 지 불과 1년이 지난 어느 날 열반경 강의를 마치고 조용히 입적하시니, 세수는 72년, 법납은 59년이었다. 동쪽 봉우리 아래에서 다비를 거행하였는데, 정수리뼈가 수백 개였다. 사리를 모시고 동화사의 동봉(東峰)에 부도를 세웠다.

쾌선 스님은 선사이면서도 화엄ㆍ정토 등의 교학에 능통하였으며, 《염불환향곡(念佛環鄕曲)》과 《청택법보은문(請擇法報恩文)》 등의 저술을 남겼다.



기성대사 염불환향곡(箕城快善 念佛環鄕曲)

이 책은 가요체 형식을 위한 아미타 정토신앙서로, 염불을 통해 본원이 마음일 뿐임을 깨닫고 그 본원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여러 가지 과정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발문을 통해 기성의 호가 모동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영조 43년에 경남 밀양군 화약산 봉천사 운주암에서 처음 간행하여 동화사로 이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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