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관광지약사여래 근본도량, 민족의 영산 팔공총림 동화사

갓바위

갓바위는 해발 850m의 관봉(冠峰) 정상에 정좌한 거대한 불상이다.

관봉은 팔공산 능선의 최동단 봉우리로 산 밑에서부터 돌계단이 길게 이어져 있다.
주차장, 식당 등 편의시절이 조성된 갓바위 집단시설지구에서 돌계단을 밟아 1시간 정도 오르면 정상에 당도하게 된다.

갓바위는 전체 높이 4m인 좌불로, 정식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이다. 머리 위에 두께 15cm 정도의 평평한 돌 하나를 갓처럼 쓰고 있어 갓바위라 불리며, 둥근 얼굴에 굳게 다운 입, 당당하고 건장한 몸체에는 위엄과 자비가 깃들여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걸작으로, 보물 제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갓바위는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는 소문이 돌아 이른 새벽부터 치성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매월 1일이나 입시철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며, 매년 1월 1일은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더욱 붐빈다.

갓바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서면 경산 와촌 방면으로 가는 길이 있고, 능선을 따라가면 인봉, 노적봉 등 각양각생의 봉우리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특히 능선재, 신령재를 지나 동봉에 당도하는 길은 팔공산의 오른 날개를 이루는 주능선길로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부인사

부인사는 동구 신무동 팔공산 남쪽 중턱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 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현재의 부인사는 옛 부인사 경역의 뒷쪽 산 밑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절이지만 한때는 고려 초조대장경을 보관했던 호국사찰로서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부인사에 관한 개창시기나 연혁은 잘 알려지지 않아 부인사의 창건연대와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 편이다. 7세기 초 창건으로 전해오고 있는 현 부인사에는 신라 선덕여왕 어진(御眞)을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보름에 신무동 주민과 사찰측 및 경주 김씨 종중에서 선덕여왕 숭모재를 지내는 것에서 부인사의 내력을 짐작할 만하다.

옛 절터가 지금은 포도밭으로 변해 있지만 현 사찰에서 200m 남쪽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고 팔공산 순환도로 남쪽으로 금당좌가 연접하고 있어 옛날 번창기의 사역 범위를 보여주고 있다. 현 부인사는 6.25 동란 때 불탄 것을 1959년 중건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국내에서 유일한 승시장(僧市場)이 부인사에 개설될 정도로 아주 번창했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의 송화암종사우운시서의 기록 중에도 부인사가 팔공산에 위치한 거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인사고려 초조대장경의 판각처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현종 3,4년(1013)경부터 조각되지 시작하여 숙종 4년(1099)에 완성된 총 1만여 권의 초조대장경은 처음 여왕사, 개국사 등에 봉안하였다가 그 후 어느 시기에 이곳 부인사에 봉안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여러 번의 인간(印刊)이 있었다. 그 후 고종 19년(1232) 몽고의 제2차 침입시 원군이 부인사 대장경과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워버렸다.

이런 자료들을 종합하여도 부인사의 창건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사찰의 위치가 지금의 영천 근방으로 팔공산 동화사와 인접해 있었고, 거찰로서 고려 초조대장경을 보관하여 외침을 극복하려 했던 호국사찰임을 알 수 있다.

파계사

팔공산 자연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는 파계사 일대는 울창한 숲, 맑은 계곡이 선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속세를 벗어난 듯한 기분에 젖어들게 한다.

부인사에서 서쪽 방향으로 차로 10여 분 정도 달리면 검문소와 함께 사거리가 나타난다. 이 사거리는 왼쪽으로 대구시내 방향의 내리막길이 뻗어 있으며, 오른쪽으로 파계사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파계사는 804년(신라 애장왕)에 창건되었다. 부인사가 신라 선덕여왕과 인연이 있었다면, 파계사조선 영조대왕과의 인연이 깊다.

조선조 숙종 임금이 어느 날 대궐 속으로 승려가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 선명하여 신하를 시켜 남대문 밖을 살펴보게 하니, 정말 한 승려가 그 앞에서 쉬고 있었다. 그 승려가 바로 파계사영원 선사였다. 기이하게 여긴 숙종 임금은 영원 선사에게 왕자 탄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부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숙빈 최씨에게 태기가 보였고, 이듬해에 왕자가 탄생했으니 바로 훗날의 영조대왕이다. 크게 기뻐한 숙종 임금은 영원 선사에게 현응이라는 호를 내린다. 당시에 파계사는 유생들의 횡포로 승려들이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에 현응은 왕실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도록 숙종에게 청해 유생들의 횡포를 막아내는 현명함을 보였다고 한다. 지금도 파계사에는 현응대사의 비석과 부도, 그리고 영조대왕의 도포가 보관되어 있다.

파계사 경내에 들어서면 원통전을 중심으로 진동루∙설선당∙적묵당 등 격조 높은 당우 4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통전은 그 중심 전각으로 영조대왕의 도포가 발견되었으며, 목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이 안치되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末寺)로 1988년 7월 28일 전통사찰로 등록되었다.

문화재로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992호), 영산회상도(보물 1214호) 등 2점의 보물과 주요민속자료 제 220호인 영조대왕 도포가 소장되어 있다. 또한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7호인 원통전(圓通殿)과 다섯 점의 문화재자료〈설선당(設線堂), 기영각, 산령각(山靈閣), 적묵당(寂默堂), 진동루(鎭洞樓)〉가 있다.

은해사

은해사는 영천시내에서 서쪽으로 16km 떨어진 팔공산 동쪽 기슭에 들어서 있다. 809년(신라 헌덕왕 1년) 창건되었으며, 경내에는 대웅전∙보화루 등 10여 채의 당우들이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다.

은해사에는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있어 눈길을 끄는 곳으로, 은해사 인근에는 깊은 내력과 보물을 간직한 암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거조암은 원래 은해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본사로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은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어진 목조건물로, 내부에 500나한이 모셔져 있다.

비구니승의 암자 백흥암에는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대좌 수미단(보물 제486호)이 있으며, 여기서 500m 떨어진 중암암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도하며 마셨다는 장군수가 샘솟고 있다. 이외에도 청동보살좌상(보물 제514호)이 모셔진 운부암, 산책로가 멋진 기기암이 있다.

- 숙박 : 치일리에 여관, 민박집이 있으며 은해사 인근에 은해사 관광농원(054-335-3435)이 있다.
- 별미 : 전통 손칼국수(구수하고 담백한 전통 손칼국수. 밀가루와 콩가루로 반죽하여 고유의 비법으로 요리
한다. 은해사 입구의 식당가에서 맛볼 수 있다.)

불로동 고분군

금호강 유역에 접하고 있으며, 불로동에서 팔공산으로 가는 도로에서 경부고속도로와 만나는 지점의 동쪽 구릉에 분포하고 있다.

총 211기의 대소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이 곳은 1938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쳐 표본 발굴하여 조사한 결과,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사방 벽을 쌓고 큼직한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장방형의 수혈식 석곽으로 금동제의 장신구와 철제무기, 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불로동 고분군은 대구 일대에 현존하는 고분들 중 외형적인 형태를 가장 잘 갖추고 있고 좁은 지역에 많은 고분들이 밀집해 있는 점 등에서 고대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고, 대구분지내에서 비슷한 권력집단이 내당동, 비산동, 불로동 등 곳곳에 할거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로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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