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고승약사여래 근본도량, 민족의 영산 팔공총림 동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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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유정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은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풍천 임씨(林氏)이고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며 경삼남도 밀양출신으로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ㆍ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ㆍ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전직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사명대사가 팔공산 일대에서 활약한 때는 1595년부터다. 스님은 동화사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인장(印章)인 ‘영남도총섭인(嶺南都總攝印)’과 승군을 지휘할 때 불었던 소라나팔, 비사리 구시(나무로 만든 밥통) 등이 현재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남아있다. 또 동화사 봉서루에 있는 ‘嶺南緇營牙門(영남치영아문)’ 편액은 동화사가 조선시대 영남승병의 지휘소였음을 방증한다. 현재 영남치영아문 원판은 성보박물관 내에 전시하고 있다.
또한 전국에 있는 20여 개의 사명대사 진영(眞影) 가운데 동화사에는 가장 오래된 사명대사 진영(보물 제1505호)이 남아있다. 이 진영은 1796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치켜 뜬 눈과 큰 코, 큰 귀 등 뚜렷한 이목구비에 긴 수염을 한 유정이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친 채 의자에 앉아 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에 위엄이 넘친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山城) 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 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용기산성(龍起山城), 악견산성(岳堅山城), 이숭산성(李崇山城),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듣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 대중에게 설법을 마치고 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니, 세납 67세, 법랍 51세였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며, 광해군 10년(1618) 대사의 출생지인 재약사(오늘의 표충사)에 사당이 세워지고 ‘표충(表忠)’이란 편액이 하사 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